돈돌날이
돈돌의 뜻은 언어학적으로는 회전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어의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은 가난과 고통 속에서 생활이 어렵지만 언제인가는 내나라 품 안으로 돌아와 잘 살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불러온 노래가 "돈돌날이"인 것이다.
"돈돌날이" 그 발원지는 북청지방으로 주로 모래산(속후면 소재)과 남대천변(신북청면 앞) 모래사장에서 가장 성대하게 놀이판이 벌어졌다. 옛날부터 한식 다음날 부녀자들은 도시락, 칼, 바가지를 가지고 이곳저곳에서 달래를 캐가면서 수하에서는 수상으로 수상에서는 수하로 그 중간지점은 남대천 백사장에 모여서 놀이판을 벌였다. 처음에는 10여 명씩 군데군데 자기 마을 단위로 놀다가 나중에는 수백 명이 한데 모여 북과 바가지 장단에 맞추어 군무를 이루면서 "돈돌날이" 가무 놀이로 신명 나게 하루를 즐겼다.
이때 추는 춤을 "달래 춤"이라 하였는데 후에 이것이 "돈돌날이"가요와 결합 되어 "돈돌날이"춤으로 발전했다.
8.15해방 후에는 북청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남, 북 어느 곳에서나 신명이 날 때(명절, 또는 축하연 등)면 "돈돌날이" 놀이판이 벌어지곤 했다. 지금 북한에서는 정책적으로 새롭게 제작하여 전 지역에서 집단적 "돈돌날이" 가무 놀이를 널리 보급 시키고 있다.
함남북청민속예술보존회에서는 세월의 흐림에 따라 점점 소멸되어 가는 애국민요 "돈돌날이"를 발굴 재연하기로 의결하고 1991년부터 경향 각지에 흩어져 살고있는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 실지 북청 현지에서 "돈돌날이"를 부르면서 춤추고 놀았던 그 부녀자들로 조직하여 연수시켜 1991년 제32회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경연대회와 공연에 참가하였다.
"돈돌날이" 노래는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불러지기 시작되었는지 잘 알 수 없으나 전해오는 속전에 의하면 조선조 중엽부터 불리워졌다고 전해진다.
함경남도 도민들은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외침을 받아 왔으며 그 지배계층의 억압과 학대를 받아 신음하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민족적 정기를 이어왔다.
그리하여 그런 시대 상환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해학과 풍자가 놀이문화속으로 흡수되었고 각종 놀이의 낙천적인 대화 속에서 면면히 맥을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돈돌날이의 뜻은 동틀 날이다. 여명을 지나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말하며 중의적으로 원을 나타낸다. "동틀 날의" 발음이 동틀날이를 거쳐 오늘날 돈돌날이로 부른다. 또한 돈돌의 뜻은 언어학적으로는 회전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어의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은 가난과 고통 속에서 생활이 어렵지만 언제인가는 내나라 품 안으로 돌아와 잘 살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불러온 노래가 "돈돌날이"인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자들로부터 강제 합방 이후의 "돈돌날이" 가무놀이는 일제의 식민지가된 우리 조선이 해방되어 자주독립국가로 돌아온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반일의 집히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돈돌날이"는 북청 고을뿐만 아니라 함남 2개시 10개군 남으로는(함흥시, 흥남시, 북청군, 홍원군, 함주군, 정평군, 북으로 이원군, 단천군, 풍산군, 회산군, 삼수군, 갑산군)과 함북 성진시 등 널리 퍼져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일제 말엽에는 일경에 의해 "돈돌날이"의 여러 노래 중 "돈돌날이", "해가 떨어진다", "삼천리 노래", "거스러미 노래"가 반일정신을 고취 시킨다는 이유로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 등의 탄압을 받았다. 위와 같이 "돈돌날이"는 전래의 민요일 뿐만 아니라 항일정신을 고취시키고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복돋아준 애국, 항일민요이다.
1. 민요와 가락마당
2. 민요와 춤 그리고 가락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