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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물장수

북청물장수

교육하면 북청을 연상케 하고 교육열하면 「북청물장수」를 들먹이게 된다. 그만큼 우리 북청은 전국적으로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북청물장수」 의 개요

교육은 국가 100년지대계를 설정하는 근간(根幹)이다. 국가나 민족의 성쇠가 교육에 달려있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는 교육의 성패에 따라 그 국가나 민족의 장래를 판가름 해 왔다.
교육하면 북청을 연상케 하고 교육열하면 「북청물장수」를 들먹이게 된다. 그만큼 우리 북청은 전국적으로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것은 우연한 결실이 아니며, 단순한 결말도 아니다. 교육이야 말로 가장 값진 투자 라는 원천적인 사고방식에 젖은 북청인들의 오랜 전통의 소산 이다.
교육을 빼고 북청을 논할 수 없으며, 교육없이는 북청인의 자부심도 없다는 「물장수」의 후예들은 자랑스러운 북청인의 명예와 긍지를 드높이며, 오늘도 이땅의 모든 영역에서 나라와 겨레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

「북청물장수」 의 유래

문헌에 최초로 「북청물장수」가 등장한 것은 철종(哲宗) 시대이다. 김좌근(안동 김씨)의 저택에 북청 출신 김(金)서방이 물을 길어낸 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북청물장수」가 어떤 규모를 갖추고 본격적으로 서로 협동하여 공동작업을 영위하기 시작한 것은 고종(高宗) 시대부터이다.
1868년(고종 5년) 신창 토성리(新昌 土城里) 출신 김서근 (金瑞根)은 돈화문 앞 단칸방에서 기거하면서 과거를 보려고 상경하는 고향 선비들의 시중을 들었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물을 지어 날랐다. 주로 삼청동(三淸洞) 공원 안에 있는 약수터 물을 길러 왔다. 차차 물통과 물지게를 이용하여 풍족 하게 물을 쓰면서 이웃 주민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상수도가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그 소문은 이웃으로 번져가 물을 배달해 달라는 집들이 불어났다. 그리하여 김서방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워 고향에 연락하여 몇 친구들을 불러 올려 「물도가(都家)」를 만들었다. 이것이 「북청물장수」의 시발이며, 「수방도가(水房都家)」의 원조(元祖)이다.

「북청물장수」 의 정신

이리하여 「북청물장수」의 「수방도가」는 점차 장안의 명물로 등장했으며, 여러 곳에 하나 둘 생겨났다.
1930년대의 중반에 와서 상수도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북청물장수」도 점차 사라져 버렸지만 그 동안의 약 70년간 「북청물장수」는 숱한 화제를 남겼다.
「북청물장수」는 무식한 노무자가 아니었다. 대체적으로 그들은 소농(小農), 중농(中農)이상의 가정 출신으로 한학 (漢學)은 물론 신학문(新學問)에도 기초과정을 마친 사람들이 었다. 비록 물지게를 지고 집집마다 물을 길러 나르지만 문맹 (文盲)인 아낙네들의 편지를 읽어주거나 대필(代筆)해주는 선비들이었다.
물론 그들이 생계나 영리를 위하여 물지게를 진 것은 아니다. 오직 그들은 자기들의 자제(子弟)를 비롯하여 친척, 친지들을 가르친다는 일념으로 물지게를 진 것이다. 교육을 제일의적(第一義的)인 사명으로 여기는 북청인의 기질을 몸소 실천으로 옮긴 것이 「북청물장수」이다.
면학(勉學)을 위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그밖에 많은 이들이 상경하면 으레 이 「수방도가」를 거쳐갔다. 만국대충절 (萬國大忠節) 이 준(李 儁)열사도 17세 때 상경하여 이 「수방도가」를 거쳐갔다.